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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1세 루빈슈타인의 마스터클래스를 보다가 든 투자 생각

by verywise 2026. 9. 20.

아르투르 루빈스타인(Arthur Rubinstein)

 

영상에서 볼 부분
브람스 인터메조 Op.118 No.2: 약 26분 43초부터
에프라임 라오르의 베토벤 소나타 Op.90: 약 37분 25초부터
루빈슈타인이 자신의 템포를 수정하는 장면: 약 45분 48초부터

 

오래된 피아노 마스터클래스 영상을 하나 봤다. 1978년 예루살렘 뮤직센터에서 91세의 아르투르 루빈슈타인이 젊은 피아니스트들의 연주를 듣고 말을 보태는 자리였고, 첫 곡은 브람스의 인터메조 Op.118 No.2였다.

연주가 끝나자 루빈슈타인이 입을 열었다.

루빈슈타인: “처음에는 너무 느렸어요. 거의 아다지오처럼 시작했어요.”

“이 곡은 그렇게 무거운 곡이 아니에요. 차분하고, 정중하고, 다정하고, 부드러운 곡이죠.”

“고통스럽게 만들 필요가 없어요. 계속 흘러가야 합니다.”

 

그리고 직접 피아노 앞에 앉아 몇 마디를 연주한다. 학생의 연주보다 조금 빨라졌지만 서두르는 느낌은 없다. 음과 음 사이가 자연스럽게 이어지고 멜로디가 앞으로 흘러간다. 그러면서 한마디를 덧붙였다.

“It must go on.”

학생의 첫 템포와 루빈슈타인이 보여준 템포를 위아래 두 줄로 비교한 그림. 위쪽 줄은 여섯 개의 음이 넓은 간격으로 따로 떨어져 있고, 아래쪽 줄은 같은 여섯 음이 좁은 간격으로 모여 하나의 곡선으로 이어져 있다.
같은 여섯 음을 두 가지 템포로 놓아본 그림

 

음 하나하나의 무게보다 음들이 이어지는 방향이 먼저라는 이야기였다. 영상의 26분대부터 실제로 그는 학생의 첫 템포가 지나치게 느렸다고 지적하면서 이 곡을 light, calm, polite, pleasant, tender한 음악으로 설명한다.

처음에는 그저 거장이 젊은 연주자에게 템포를 가르치는 장면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보다 보니 이상하게 투자 생각이 났다. 

깊이는 무거움과 같은 말이 아니었다

젊은 피아니스트가 왜 그렇게 느리게 연주했는지는 알 수 없다. 브람스 후기 작품의 깊이를 표현하려다 한 음 한 음에 너무 많은 것을 실었을 수도 있는데, 루빈슈타인이 반복해서 지적하는 지점은 분명했다.

루빈슈타인: “무겁게 하지 마세요.”

“단순하게 가면 됩니다.”

“멜로디가 계속 노래해야 해요.”

 

투자를 공부할 때도 비슷한 순간이 있다.

처음에는 PER을 배우고, PBR과 ROE를 본다. 조금 더 공부하면 ROIC와 FCF를 보고, 금리와 환율, VIX와 신용스프레드도 확인한다. 차트를 열면 이동평균선, RSI, MACD까지 붙는다.

아는 것이 많아질수록 더 많은 것을 사용해야 제대로 분석하는 것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그런데 어느 순간 반대 방향으로 가는 때가 있다. 수많은 숫자를 볼 수는 있지만 모든 숫자를 볼 필요는 없다는 것을 알게 된다. 기업을 볼 때도 다시 몇 가지 질문으로 돌아온다. 이 회사는 돈을 잘 벌고 있는가. 그 힘이 오래갈 수 있는가. 지금 가격은 너무 비싸지 않은가. 그리고 내 판단이 틀렸을 때 얼마나 잃을 수 있는가.

공부한 기간에 따라 실제로 들여다보는 지표 수가 어떻게 변하는지 그린 곡선. 처음에는 낮게 시작해 배운 것이 늘어나는 구간에서 가장 높아지고, 오래 한 뒤에는 다시 낮아진다. 실제 데이터가 아닌 설명용 예시 그림이다.
공부한 기간과 실제로 보는 지표 수

 

복잡함을 모르는 사람의 단순함과, 복잡함을 충분히 지나온 사람의 단순함은 다르다. 루빈슈타인이 91세에 보여준 가벼움도 음악을 가볍게 생각해서 나온 것은 아닐 것이다. 수십 년 동안 수많은 음을 연주한 끝에 무엇을 더해야 하는지가 아니라 무엇을 덜어내야 하는지가 보이기 시작한 것에 가까워 보였다.

느린 것이 좋은 것이 아니라 자기 템포를 아는 것

처음 이 장면을 보면서는 장기투자가 떠올랐다. 서두르지 말고 천천히 투자하라는 이야기처럼 들릴 수도 있다. 하지만 다시 보면 루빈슈타인의 말은 조금 다르다. 빨리 연주하라는 것이 아니라 곡에 맞는 템포를 찾으라는 것이다.

투자도 그렇다. 장기투자한다고 모든 판단을 느리게 할 필요는 없다. 기업을 이해하는 데는 충분히 시간을 들여야 한다. 시장이 흔들릴 때는 하루하루의 주가에 반응하지 않고 기다릴 수도 있다. 하지만 실적이 무너지고 처음 그 기업을 샀던 이유가 사라졌는데도 장기투자니까라며 판단을 미룬다면 그것은 인내와는 다른 문제다. 

반대로 좋은 기업을 합리적인 가격에 샀고 처음의 투자 근거가 그대로 유지되고 있다면 매일 주가를 보며 움직일 이유도 없다. 분석할 때는 충분히 보고, 결정할 때는 결정하고, 기다릴 때는 기다린다. 좋은 투자에도 자기 템포가 필요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91세의 거장은 자신의 템포도 고쳤다

관련 마스터클래스 전체 영상을 더 보면 더 인상적인 장면이 나온다. 이번에는 다른 젊은 피아니스트가 베토벤 피아노 소나타 Op.90을 연주한다. 첫 악장이 끝난 뒤 루빈슈타인은 좋은 템포였다고 칭찬하고, 이어 2악장을 조금 더 연주해 보라고 한다.

연주를 듣고 난 뒤 루빈슈타인이 웃으며 이야기한다.

루빈슈타인: "나는 젊은 사람들에게 내가 좋다고 생각하는 것, 좋지 않다고 생각하는 것을 말해주는 걸 좋아합니다."

"그런데 나도 젊은 연주자에게 배우는 일이 있어요."

"당신은 2악장을 내가 연주하던 것보다 빠르게 연주했어요."

 

잠시 뒤 웃으며 덧붙인다.

"당신이 맞아요."

"내가 다시 이 곡을 연주한다면 그 템포를 받아들이겠습니다."

마스터클래스에서 가르침이 오간 두 방향을 두 줄로 나타낸 그림. 윗줄은 루빈슈타인이 브람스 Op.118에 대해 너무 느렸다고 젊은 피아니스트에게 전하는 방향이고, 아랫줄은 젊은 피아니스트의 베토벤 Op.90 템포를 루빈슈타인이 받아들여 자신의 템포를 고쳐 잡는 반대 방향이다.
같은 자리에서 오간 두 방향

 

예루살렘 뮤직센터도 이 장면을 루빈슈타인이 보여준 겸손에 관한 교훈으로 따로 소개하고 있다. 실제 영상에서도 그는 학생의 빠른 템포가 더 낫다고 인정하며 다시 연주한다면 그 템포를 받아들이겠다고 말한다.

이 장면에서 생각이 조금 달라졌다. 앞에서는 91세의 거장이 젊은 연주자의 템포를 고쳤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같은 거장이 자신의 템포를 젊은 연주자에게서 고쳤다. 이게 고수가 아닐까 싶었다.

여기서 조지 소로스가 떠올랐다

투자의 세계에서 비슷한 사람을 찾는다면 조지 소로스가 떠오른다. 소로스는 시장에 대한 자신의 생각을 강하게 밀어붙이는 투자자로 유명했지만, 동시에 자신의 판단이 틀렸다는 것을 알아차리면 생각을 빠르게 바꾸는 사람이었다.

1995년 《The New Yorker》 인터뷰에서 소로스는 자신의 가장 큰 강점 가운데 하나를 내 실수를 남들보다 빨리 알아차리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그와 함께 일했던 트레이더 잭 무어먼도 소로스에 대해 “자기가 옳다는 확신이 강한 것이 아니라, 무엇을 봐야 자신이 틀렸는지 알 수 있는지가 분명한 사람”이라고 설명했다. 

가장 유명한 이야기는 트레이더 장마뉘엘 로장(Jean-Manuel Rozan)과의 일화라고 한다. 장마뉘엘 로장이 어느 날 소로스와 주식시장에 대해 오랫동안 논쟁했다. 당시 소로스는 시장을 강하게 비관했고 그 이유를 설명하는 정교한 논리도 갖고 있었다. 그런데 시장은 반대로 크게 올랐다.

2년 뒤 두 사람이 다시 만났을 때 로장이 그때의 대화를 기억하느냐고 물었다. 소로스의 대답은 간단했다.

“생각을 바꿨고, 큰돈을 벌었죠.”

 

처음 전망이 틀렸다는 사실보다 중요한 것은 그 뒤였다. 자신의 논리를 방어하는 대신 생각을 바꾸고 실제 포지션까지 바꿨다. 이것은 단순한 투자 기술이 아니었다.

소로스는 자신의 철학을 Fallibility, 오류 가능성에서 출발시켰다. 인간이 세상을 이해하는 방식은 본질적으로 불완전하며, 자신의 생각 역시 언제든 틀릴 수 있다는 것이다. 그는 1998년 저서 《세계 자본주의의 위기》 1장 ‘오류 가능성과 재귀성(Fallibility and Reflexivity)’에서 자신의 오류 가능성을 인정하고 스스로의 생각을 비판적으로 바라보는 태도가 금융시장에서의 성공에 중요했다고 설명했다. 이 장은 현재 소로스 공식 홈페이지에서도 발췌본으로 공개돼 있고 1995년 강연에서는 자신의 철학을 아래와 같이 설명했다.

“우리 자신의 오류 가능성을 믿는 것.”

루빈슈타인과 소로스는 전혀 다른 세계에서 살았다. 한 사람은 피아노 앞에 앉았고, 다른 사람은 금융시장에 있었다. 그런데 높은 수준에 올라간 뒤 보여준 태도에는 묘하게 닮은 부분이 있었다. 자신의 기준은 분명하다. 그러나 그 기준보다 나은 답이나 자신의 오류를 보여주는 증거가 나타나면 그것을 받아들인다. 확신이 없어서 생각을 바꾸는 것이 아니다. 확신과 수정 가능성을 동시에 가지고 있는 것이다.

한 음을 잘 치는 것과 좋은 음악을 만드는 것은 달랐다

루빈슈타인은 다른 학생을 가르치면서도 비슷한 이야기를 계속한다. 음 하나하나를 지나치게 의식하면 멜로디가 끊어진다. 멜로디는 노래처럼 이어져야 하고, 단순하게 흘러가야 한다는 것이다. 실제 마스터클래스에서도 세부 표현에 너무 신경 쓰느라 흐름이 멈추는 학생에게 멜로디를 계속 노래하게 하라고 반복해서 말한다.

투자에서도 한 번의 판단에 쉽게 의미를 크게 부여한다. 저점을 정확하게 잡았거나 크게 오른 종목을 하나 골랐다면 그것을 실력이라고 생각하기 쉽다. 반대로 한 종목에서 크게 손실을 보면 내 투자 전체가 실패한 것처럼 느껴질 수도 있다.

하지만 긴 투자생활은 한 번의 매수로 결정되지 않는다.

기업을 고르는 것, 가격을 보는 것, 한 종목에 얼마를 투자할지 정하는 것, 손실을 관리하는 것, 필요하면 생각을 바꾸는 것, 그리고 좋은 투자는 오래 보유하는 것이 연결돼야 한다.

한 번의 매수는 음 하나에 가깝다. 투자생활 전체가 곡이다.

아무리 좋은 음을 하나 냈더라도 거기에서 음악이 멈추면 곡은 완성되지 않는다. 투자도 한 번 크게 버는 것보다 다음 판단을 계속 이어갈 수 있는 상태를 유지하는 것이 중요하다. 복리 역시 시간이 끊기지 않아야 작동한다. 그래서 루빈슈타인의 짧은 말이 투자 영역에서도 묘하게 연결되며 뇌리에 남는다. “It must go on.”

브람스에서 루빈슈타인으로, 소로스를 지나 지금의 우리에게

브람스는 1893년에 이 곡을 썼다. 그가 남긴 것은 악보다. 하지만 그 음표를 어떻게 이어갈지는 다음 세대 연주자의 몫이었다. 수십 년 뒤 루빈슈타인은 평생 쌓은 경험으로 젊은 피아니스트의 브람스를 고쳐줬다. 그런데 같은 자리에서 자신보다 어린 피아니스트가 더 좋은 베토벤의 템포를 들려주자 자신의 방식도 고쳤다.

금융시장에서는 소로스가 비슷한 태도를 보였다. 강한 투자 아이디어를 세우고 큰 포지션을 잡을 수 있었지만, 현실이 자신의 생각과 달라지면 처음의 논리를 지키는 대신 판단을 수정했다. 분야는 다르지만 오랜 시간 한 길을 걸어온 사람들에게서 비슷한 모습이 보인다.

얼마나 많이 알고 있는가보다 무엇이 중요한지 구분할 수 있는가. 자신의 판단을 믿으면서도 틀렸다는 증거를 받아들일 수 있는가. 필요할 때는 힘을 주고, 그렇지 않을 때는 힘을 뺄 수 있는가.

처음에는 더 많이 배우는 것이 중요하다. 피아니스트는 수없이 연습해야 하고 투자자는 기업과 회계, 경제와 시장을 공부해야 한다. 배운 것이 많아지면 그것을 모두 사용하고 싶어지는 시기도 온다. 연주자는 자신의 해석을 더 넣고 싶고, 투자자는 더 많은 지표와 더 정교한 분석을 사용하고 싶어진다.

그런데 정말 오래한 사람들을 보면 조금 다른 모습이 나타난다. 많이 알지만 필요한 것만 사용한다. 자신의 기준은 분명하지만 그 기준의 포로가 되지는 않는다. 틀리지 않으려고 버티기보다 틀렸다는 것을 알게 됐을 때 판단을 고친다.

고수는 틀리지 않는 사람이 아니라, 자신이 틀렸다는 것을 알아차렸을 때 생각을 고칠 수 있는 사람인지도 모른다.

브람스의 음악을 듣다가 투자까지 생각이 이어졌다. 좋은 연주에는 자기 템포가 있고, 투자에도 자기 호흡이 있다. 오래 이어가기 위해서는 그 호흡을 지키는 것도 필요하지만, 지금의 템포가 더 이상 맞지 않는다는 것을 알아차리는 감각도 필요하다.

91세의 루빈슈타인이 젊은 피아니스트에게 자신의 템포를 고쳐준 뒤, 다른 젊은 피아니스트에게서는 자신의 템포를 고쳤다. 소로스 역시 강한 확신으로 투자하면서도 현실이 달라지면 판단을 바꿨다. 두 사람에게서 내가 오래 기억하고 싶은 것은 결국 비슷하다.

자기 기준을 갖되, 자기 기준에 갇히지 않는 것.